비밀스런 공간 속 시간적 향수 그린
샘플 용기가 심플하고 길쭉한 모양이 실제 한 떨기의 이파리를 연상시킨다. 본품은 지금 보니까 너무 정형화된 용기인데 깔끔하니 괜찮다. 녹색 색감이 이쁘네. 향수에 그린색 용기는 필승인가봄. 향수명과 달리 그린 허브 향은 제 상상보다 뭉개져 있으며 뒤늦게 터진다. 살짝 텁텁한 파우더 향이 격정적이게 휩싸여 숨에 딸려 가 입속까지 헤집는 듯하다. 입안마저 텁텁해지는 묵직한 공기 감각 맴돌다가 이윽고 킁킁 한번 더 맡으면 둔탁하게 뿜어져나오는 릴리향이 강하다. 옛날 리리코스의 일리 향수에 버금가도록. 아니. 거의 닮았다. 둘이. 여기까진.
특정한 공간에 금이 가는 풀내음 녹진함은 벌어진 이음새에 묻히는 것 같기도 하다. 돌연 브랜드 향 노트 스토리를 읽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찾은 독일의 한 정원이라니깐 아이러니하게 이해가 가는 향. 넥타이 흘러내릴 듯 풀어헤친 채로 옷 대신 향을 입은 독일 정원사가 날이 잘 선 은가위를 들고선 나무 끝 모양 봉긋하게 다듬는 틈 사이 그 장면을 지나가고 있는 듯한 다른 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때 공허한 시간을 달래주던 반쯤 꺾인 풀이 바람에 짓이기는 소리. 그림자만한 발에 짓눌린 잔디 냄새. 물뿌리개로 정원에 물을 주었는지 수없이 흐트러지는 여러 꽃잎들 틈새로 잎에 맺힌 물방울이 촉촉하게 말라가는 수분기. 적당히 날씨 좋은 어느 날이 집약된 분위기. 서로 닮고 닳은 냄새로. 조금은 알 것 같다. 닮아가고 닳아간다는 건. 어떤 이에겐 이토록 사랑하고 사랑받던 향이 아닐지 그려본다.
한편으로는 성당 안에서 미사모를 뒤집어쓴 누군가로부터 성스럽게 젖어나온 향으로 떠오른다. 아마도 눈살 찌푸려지는 햇볕, 푹푹 찌르는 더위에는 향이 좀 갑갑하다 느낄 것 같겠다만 뒤에 잇따르는 싱그러운 잎향이 흠뻑 적셔짐. 시원한 물 한 모금 같은 존재로 거듭남. 그러면 앞선 향들과 이롭게 뒤범벅되어 산뜻하게 쏟아진다. 자잘히 부서진 잎 부스러기 떨어질 쯤 빛 눈부시게.
향수 잎 즉, 식물향은 중심을 이룬다기보다 겉에 미세하게 옮겨 붙는 격이고 이파리 향수로부터 '이파리' 보다는 '향수'에 초점 맞추면 좀 더 코 편히 맡을 수 있지 않을까. 로즈마리 허브향 섞인 풀잎 냄새라기엔 자연적인 향을 가꾼, 뭔가 가공된 냄새가 나므로.
그것을 막론하고 발향력은 좋은 편이다. 향이 진하고 오래 가서 전날 옷에 칙칙 마구 뿌렸다가 하루 두고 입기도 한다. 잔향이 밴 옷은 시원 포근한 냄새로 가득하다. 다음 번에는 무채색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향긋한 무화과와 어우러진 은은한 우디향, 다슈 휘그 앤 베이 써보고 싶음. 이 향도 샘플 구매칸 생기면 좋을 듯. 마저 시향해보고 싶다. 오프라인 매장에선 여러 사람들이 쓰니까 시향할 때 향이 좀 다르게 휘돌아 향수는 샘플 체험 구매가 더 좋더라.